낙산사

속초모아 0 549 2017.04.11 16:44
설악의 줄기가 동쪽 바다로 잦아지는 끄트머리, 멀리 설악을 뒤로 하고 끝없이 너른 동해를 향해 선 오봉산의 품안에 자리 잡은 낙산사는 구구절절한 창건 사연을 간직하고 있다.

약 1,300년 전인 신라 문무왕 때, 당나라에서 화엄 사상을 공부하던 중 그들의 신라 침공 계획을 눈치 채고 이를 알리러 급히 귀국한 애국승이자 후에 화엄종파의 큰 재목이 된 의상이 창건했다고 알려지고 있는데, 그 내력을 들여다보면 낙산사의 중심을 이루고 있는 관음 신앙을 엿볼 수 있다.

의상은 동해변에 관음보살이 살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 이곳 양양의 해안 굴을 찾아왔다. 이레 동안 기도를 하다가 앉은 자리째로 물 위로 뛰어들었는데 팔부신중(불법을 수호하는 8종류의 신)이 나타나 그를 굴 속으로 안내하였다. 의상이 굴 속에서 예를 올리니 동해의 용이 나타나 여의주 한 알을 바치고 수정 염주 한 꾸러미가 내려오므로, 그것을 가지고 나왔다. 의상이 다시 이레 동안 기도를 하였더니 관음보살이 홀연히 나타나 이르기를, “앉은 자리 위 꼭대기에 한 쌍의 대가 솟아날 것이니 그 자리에 불전을 지어라” 하는 것이었다. 의상이 그 말을 듣고 나오니 과연 쌍죽이 땅에서 솟아나왔다. 이에 관음상을 빚어 모셨더니 그 대가 없어졌으므로, 의상은 그제야 이곳에 진신이 거주함을 알게 되었다. 그리하여 절의 이름을 ‘낙산사’라 하고 수정 염주와 여의주를 성전에 모시게 되었다.

‘낙산’(洛山)이라는 이름도 관음보살이 거주하고 있는 인도의 보타낙가산에서 유래한 것이니, 창건 설화나 절 이름에서 이 절이 관음사찰임을 알 수 있게 된다.

그 뒤를 이어 원효도 관음보살을 만나겠다고 이곳을 찾아들었다. 원효는 의상과는 지기(知己)로 당나라 유학을 함께 떠났다가 도중에 해골 속에 담긴 물을 마신 후 마음을 달리 먹고 유학을 포기했다는 일화로 유명한, 의상과 함께 신라 불교의 쌍벽을 이루는 스님이다.

그런데 원효는 관음보살을 만나지 못하였다. 양양 부근에 다 왔는데, 흰옷 입은 여자가 벼를 베고 있기에 희롱 삼아 벼를 달라고 하였다가 그 여자로부터 ‘벼가 아직 익지 않았다’는 냉담한 소리만 얻어들었다. 다시 길을 재촉하다가 개울의 다리 밑에 이르니 한 여인이 빨래를 하고 있기에 물을 달라고 청하였다. 그 여인이 빨래하던 물을 한 바가지 떠주자 원효는 그 물을 쏟아버리고 냇물을 다시 떠서 마셨다. 그때 들 한가운데 서 있는 소나무에서 파랑새 한 마리가 푸드득 날아오르며, “휴제호 화상아!” 하고는 숨어버리는 것이었다. 파랑새가 떠난 자리에는 신발 한 짝이 벗겨져 있었다. 낙산에 이르고 보니 관음상 자리 밑에 그 신발의 다른 한 짝이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닌가. 그제서야 원효는 벼를 베던 흰옷 입은 여인이며 빨래하던 여인, 그리고 파랑새 모두가 관음이 변장하고 나타났던 것임을 깨달았다. 한편 원효는 의상이 수정 염주와 여의주를 얻었다는 그 굴에 들어가려 하였지만, 풍랑이 크게 일어 들어가지 못하였다.

의상과 원효는 둘 다 신라 불교의 쌍벽으로 일컬어지는 큰스님인데, 어찌해서 한 스님은 관음을 만나고, 다른 한 스님은 관음을 만나지 못했을까?

의상과 원효는 여러 면에서 차이가 있었다. 의상은 진골 귀족 출신으로 당나라에서 화엄종을 공부하고 돌아와 영험한 산마다 거찰(화엄 10찰)을 세우고 수많은 제자를 길러냈으며, 호국 신앙을 내세우면서 신라 왕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았다.

이와는 달리 원효는 육두품 출신에 당나라 유학길도 포기하고 ‘모든 것이 마음에 달렸다’는 깨달음을 얻었다. 나이 들어서는 걸인의 차림에 ‘무애가’(無碍歌)를 부르고 다닐 정도로 속세에 연연하지 않았으며, 개인적 실천과 깨달음을 더 중요하게 여겼다. 불교 사상 체계를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이해시키기 위해 수많은 저작을 남기기도 하였다.

통일 전쟁을 마치고 새로운 국가 체제를 갖추어나갈 무렵이었던 당시의 신라 입장에서 보면 원효 같은 자율성보다는 질서 체계를 옹호하는 의상의 이념이 더욱 요긴하였으므로, 원효에게 향하는 민심을 의상에게로 돌릴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의상의 법력이 우위임을 입증할 만한 신화적인 이야기가, 반대로 원효는 의상에 미치지 못하는 하수임을 증명할 수 있는 이야기가 필요했던 것이다.

정치와 사상의 동반자적인 관계였으나 의상은 영광을 얻었고 반대로 원효는 상처를 피할 수 없었다.

이후 굴산사를 창건했던 범일이 헌강왕 2년(853)에 낙산사를 중건하였는데, 이후 고려 때 몽골의 침입으로 폐허화되었다. 당시 주지였던 아행이 수정 염주와 여의주를 갖고 도망하려 하였는데, 절의 노비였던 걸승이 목숨을 걸고 그것을 빼앗아 땅에 묻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전쟁이 끝나고 두 보주는 관가에서 보관하게 되었으며, 비록 절은 재건되었지만 예와 같은 영화는 생각지도 못하였다.

조선에 들어와서는 1466년 오대산 상원사를 참배하고 나서 낙산사에 들렀던 세조의 명령으로 크게 중창되었다. 이때 원래 있었던 삼층석탑을 7층으로 올리면서 의상이 관음보살과 용에게 얻었다는 수정 염주와 여의주를 탑 속에 안치했다고 한다. 지금 낙산사가 보유하고 있는 문화재, 칠층석탑(보물 제499호), 동종(보물 제476호), 홍예문(지방문화재 제33호) 등은 모두 이 무렵에 만들어졌다.

세조 때 중건된 낙산사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 또다시 허물어졌고, 한국전쟁 때에도 폐허가 되었다. 그리고 보면 낙산사는 온갖 전쟁이란 전쟁은 다 치른 셈이다. 지금 낙산사를 이루고 있는 원통보전과 범종각 들은 모두 1953년 이후에 복원된 최근 건축물들이다. 낙산사를 대표하는 불상처럼 알려져 있는 높이 16m의 해수관음상은 1977년에 완성되었다. 그 높이는 단일 불상으로는 동양 최대라고 하며, 마치 등대처럼 10리 안팎까지 모습을 내보이고 있다. 이 불상이 ‘관음’인 것도 창건 당시의 관음 신앙을 상기시켜준다.

낙산사에 오면 원통보전이 있는 경내보다도 우선 의상대라는 정자에 들어 동해 바다의 풍광을 즐기게 마련인데, 의상대는 1926년 만해 한용운이 낙산사에 머물 때 세운 것이다. 이곳의 해돋이는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는 관동팔경의 하나이다. 의상이 수도하던 뜻 깊은 곳이며 산과 바다가 어우러져 해변 절승을 이루는 곳이니 정감 풍부한 시인이 어찌 정자 하나 짓고 싶지 않았을까. 의상대는 이후 10년 뒤에 큰 폭풍우로 무너졌다가 다시 세워졌고, 1975년 지금의 모습으로 개축되었다.

의상대에서 북쪽으로 보이는 높은 절벽 위에 다소곳하게 올라앉아 있는 작은 암자가 홍련암이다. 의상이 수정 염주와 여의주를 얻었다는 바로 그 해안 석굴 위에 지어진 암자이다. 바닷가 석굴 위에 지어진 것도 특이한데, 법당 마루 밑으로 지름 10㎝ 정도의 구멍을 뚫어 출렁이는 바다를 바라볼 수 있도록 한 것도 대단하다. 의상의 창건 설화를 뒷받침해주는 장치이다.

소나무 숲과 대밭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는 홍련암을 나와 다시 의상대로 해서 새로 조성해놓은 의상대사 부도비와 보타전을 거쳐 포장길을 따라 올라가면 어마어마한 풍채의 해수관음상이 나온다. 덧붙여 할 말을 잃고 해수관음상 주위를 빙글빙글 돌다가 굵은 해송이 숲을 이룬 곳에서 오솔길을 찾아 들어서면 범종각과 원통보전이 있는 경내에 이르게 된다. 이때 원통보전의 외곽을 둘러싸고 있는, 교실 칠판만한 크기의 별꽃무늬 담장과 무심코 마주치게 되는 행운은 아무에게나 오는 것이 아니다.

이상과 같이 낙산사의 후문으로 해서 의상대, 홍련암, 해수관음상을 거쳐 경내로 들어서지 않고, 정문 쪽의 홍예문을 지나 사천왕문을 통과해 요사채와 선방, 그리고 범종각이 있는 경내로 들어오는 방법도 있다.

사시사철 꽃을 볼 수 있도록 절 마당에 정원을 꾸며놓은 정갈한 경내에는 보물로 지정된 범종과 칠층석탑이 있다. 관음보살을 모시는 절이기에 원통보전이 중심 당우가 된다.

화강석 26개를 장방형으로 다듬어 무지개 모양으로 세워놓고 잡석으로 벽을 쌓은 뒤에 누각을 올린 홍예문은 세조 11년(1465)에 만들어진 것으로, 당시 강원을 이루고 있던 26개 고을에서 돌을 하나씩 내놓아 석축을 쌓았다고 한다. 돌 문 위의 누각은 1963년 세운 것이다.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33호로 지정돼 있다.

교통, 숙식 등 여행에 필요한 기초 정보
양양군 강현면 전진리에 있다. 양양에서 7번 국도를 타고 속초 쪽으로 5.2㎞ 가면 길 오른쪽으로 낙산도립공원이 보이는데, 낙산사는 그 안쪽에 있다. 낙산비치호텔 옆으로 해서 의상대를 지나 들어갈 수도 있고, 7번 국도와 바로 이어진 일주문으로 들어가 홍예문을 통해서 들어갈 수도 있다.

낙산도립공원 안에는 호텔, 여관, 민박 등 숙박시설이 많고, 속초·설악동·양양·강릉 지역과 버스 연결이 잘되어 있어 교통이 무척 편리하다. 그러나 관광철이면 무척 붐빈다.

매표소 입구에 대형버스도 여러 대 주차할 수 있는 공간이 있으며, 해수욕장 쪽에는 매우 큰 주차장이 있다.

알찬 답사, 즐거운 여행을 도와주는 유익한 정보
양양읍에서 7번 국도를 따라 강릉 쪽으로 14㎞ 정도 가면 닿는 현북면 하광정리 해안에는 하조대라는 곳이 있다. 하조대는 조선 개국 공신인 하윤과 조준이 이곳에 은거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기암절벽과 노송이 어우러진 경승지로, 넓게 터진 수평선과 함께 절벽 아래로 부딪혀오는 흰 파도는 동해 바다의 정취를 물씬 느끼게 한다.
속초모아 0 549 2017.04.11 16: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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